17, 8세기의 수학

 

 사회적 배경

 

 르네상스에 의해 힘을 얻은 세계 무역은 보다 많은 상품을 유통시킴으로써 종래의 소박한 수공업적 생산 방법으로는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수공업 생산만으로는 이제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새로운 생산 형태의 등장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6세기 말쯤부터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에서 소위 메뉴팩쳐(manufacture, 工場制手工業)라고 부르는 수공업식 제조공업, 즉 전용 작업장을 만들고 거기에 노동자를 고용하여 인간의 손 대신에 간단한 기구를 사용하여 분업에 의한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생산 조직을 배경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은 국제 시장으로 진출하였고, 나아가서 주로 다른 나라와의 중계무역으로 세계 상업을 주름잡은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의 세력에 도전하였으나, 마침내는 한 때 세계에서 부강(富强)을 자랑하던 이들 두 나라도 급격히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시대는 이제 매뉴팩쳐의 독무대를 만난다. 매뉴팩쳐는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상품을 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했다. 중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와 노동력을 충당하고,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한 것은 그 영향이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상인은 세계시장을 거침없이 휩쓸었다. 그러나 개척에는 공존(共存)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어서, 마침내는 식민지 전쟁(7년 전쟁(1756-63))을 유발하였고, 영국이 대식민지 제국으로서 "유니온 잭의 깃발이 나부끼는 곳에 언제나 태양이 빛난다. "고 큰 소리 치는 시대가 찾아왔다.

 17세기의 수학에 주어진 커다란 자극은 당시의 모든 지적 추구들과 더불어 일어난 것이었고, 의심할 바 없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 기간에 인간의 권리를 신장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경제적 중요성을 높이는 잘 발달된 기계들이 만들어졌으며, 한편으로는 지식의 국제화와 과학적 회의론의 풍조가 싹트고 있었다.

 

 ● 대수학의 기호화 - 비에트와 해리오트

 비에트의 뛰어난 후계자 해리오트(T, Harriot, 1560 - 1621)는 비에트의 뒤를 이어 대수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대수학 책 <<해석적 방법>>은 근대 대수학(代數學)의 모습을 거의 갖추고 있었다.

 그는 '대수방정식의 근의 수는 그 차수(次數)와 같다'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아직은 음수와 허수를 수로서 인정할 수 없었다. 즉, 그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분명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정리가 수학의 정리로서 증명되기까지는 가우스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간 방정식에 대한 연구는 4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이끄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다음은 5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4차방정식으로 유도할 차례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n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은 n-1차 방정식으로부터 유도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를 거듭해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방정식을 푼다는 것은 방정식의 계수(係數)를 가지고 유리식이나 무리식을 구성하고 이 값을 그 방정식의 미지수에 대입했을 때 방정식을 만족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즉, 방정식의 해를 구한다는 것은 계수 사이에 사칙연산과 n제곱근을 구하는 셈을 치뤄서 하지 않았다. 5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구하는 문제는 대수학이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바꾸어 추상대수학(抽象代數學)으로 거듭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삼각법 - 비에트와 네이피어

 

 네이피어(John.Napier, 1550 - 1617) 직각구면 삼각형을 푸는데 유용한 두 개의 법칙을 고안해 냈다. (아래 그림에 통상적인 방법으로 문자를 써 넣은 직각구면삼각형이 그려져 있다. 삼각형의 오른쪽에 삼각형에서와 같은 문자가 C를 제외하고 동일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으며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 한 원이 있다. C, B, A에 붙어있는 바(-)는 보(補, complement)를 뜻한다. (즉, = 90°- B). 각의 크기인 를 원부분이라고 부른다. 원에는, 임의의 주어진 부분에 대하여 인접한 두 원부분과 인접하지 않는 두 부분이 존재한다. 주어진 부분을 가운데 부분이라고 부르고, 두 인접한 부분을 인접부분, 인접하지 않은 두 부분을 반대부분이라고 부르자.)

네이피어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1. 임의의 가운데 부분의 사인은, 두 반대 부분의 코사인의 곱과 같다.

  2. 임의의 가운데 부분의 사인은, 두 인접 부분의 탄젠트의 곱과 같다.

 

●로그의 발명 - 네이피어와 브리그즈

 

 수치 계산이 중요시되는 많은 분야들, 이를테면 천문학,항해,무역,공학,전쟁 등에서 계산이 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되기를 바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증가되어 왔다. 이러한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네 가지 괄목할 만한 발명, 즉, 힌두-아라비아 표기법,소수,로그,현대 컴퓨터가 계속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17세기 초반에 로그를 창안한 네이피어는 그 시대의 정치와 종교적 논쟁에 대부분의 정열을 쏟았다. 그는 정치적, 종교적 논쟁으로부터 휴식을 취하기 위해 수학과 과학의 연구로 자신을 유인하였는데, 그 결과 비범한 네 가지 결과가 현재 수학사에 기록되고 있다. 즉, 직각구면삼각형을 푸는데 이용되는 공식, 빗각구면삼각형을 푸는데 유용한 네이피어의 유동식, 네이피어의 막대, 그리고 로그의 고안이 그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계산법으로서의 로그의 장점은 곱셈과 나눗셈이 로그에 의하여 보다 단순한 계산인 덧셈과 뺄셈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 동점 P와 Q를 점 A, C로부터 동시에 같은 속도로 화살 방향으로 출발시킨다. P의 속도는 점 B로부터의 거리에 비례하여 느려지지만 - 즉, B까지의 거리에 역비례하지만 - Q의 속도는 처음과 같은 것으로 한다. 여기서 네이피어는 이 변화하는 거리 CQ를 거리 PB의 로그라고 불렀다. 현대식으로 나타내면 이 정의는 CQ = x , PB = y 라고 할 때  미분방정식 dy/dx = -y를 만족시키고, x와 y의 관계는 x = -logy , 즉 x = log 1/e y이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네이피어의 로그는 1/e을 밑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는 로그표의 수치를 기하학적인 방법이 아니고 계산에 의해서 구하였다. 네이피어가 로그를 발명한 것은, 오직 계산 ( 곱셈, 나눗셈, 그리고 특히 삼각법의 계산 )을 간단히 치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였다.

런던의 그레샴 대학의 기하학 교수이며 후에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된 브리즈그( Henry Briggs, 1561~1631) 가 위대한 로그발명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방문한 계기로, 네이피어와 브리즈그는 1의 로그값이 0, 10의 로그값이 10의 적당한 거듭제곱이 되도록 수정하면 로그표가 더욱 유용하리라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것이 소위 브리즈그의 로그, 혹은 상용로그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로그가 탄생하게 된 동기이다.

  

● 실제적인 계산 기술에 대한 관심

 

로그의 발명은 궁극적으로는 삼각함수 이외의 새로운 초월함수를 도입시킴으로써 수학의 구조 자체에 큰 변혁을 가져왔지만, 당시에는 실용적인 면에서만 이 새로운 계산 기술을 환영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론상의 중요성이라는 점에서 비에트의 연구에 비할 바가 못되었었다. 케플러가 로그의 출현을 기뻐한 것은, 새로운 수학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복잡한 천문계의 짐을 덜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수학에 대한 시대적인 관심은 실용적인 면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다. 실제, 갈릴레이는 수학자라기보다도 물리학자 겸 천문학자였다.

 

  

결어

 

수학사상 17,8 세기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위대한 발견이 이룩된 시대였다는 사실 만으로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새로운 수학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즉, 17,8 세기에 볼 수 있는 수학상의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변화는, 현실적 문제 (즉, 항해술이며 탄도계산 등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수학의 기본개념이라든지 기능의 변화를 밖으로부터 요구받게되어, 영역이 전보다 훨씬 확대되었고, 수학자체의 내부에도 커다란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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