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분학의 기원

 

 

    미적분학의 기초를 이루는 주된 개념은 참으로 오랜세월동안 발전되어왔다. 그 첫걸음은 그리스수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리스에서 수는 정수의 비율이었으므로 수직선은  그 자체에 틈을 가졌다.  그들은 이를 회전시켰는데 이것은 수의 덧셈에서 길이, 면적 그리고 체적을 재는데 곤란하였다.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모든 길이를 숫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약 기원전450년 엘레아의 Zeno는 무한대에 근거를 둔 수의 문제를 제시했다. 예를 들면 그는 운동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운동의 예는 만약 어떤 사람이 A에서 B까지 간다면 B에 도달하기 전에 AB의 중점인 B1 를 지난다. B1 으로 갈 때 먼저 AB1의 중점 B2 를 지나야한다.  이를 계속하면 A가 거리의 무한의 수를 반드시 지나가기 때문에  B로 이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Leucippus, Democritus와 Antiphon은 모두 약 기원전370년 Eudoxus에 의한 과학적 기초에 기반을 둔 그리스의 실진(悉盡)법에 기여하였다. 이것이 실진법으로 불려지는 이유는 이 방법이 구하고자하는 면적을 계산하기 위해 필요한 면적을 계속 더해야만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Archimedes는 기원전255년쯤 그리스의 연구업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를 만들었다. 그의 첫 번째 중요한 발전은 포물선의 부분의 면적은 같은 밑변과 꼭지점을 가진 삼각형면적의 4/3이고 외접하는 평행사변형면적의 2/3임을 보인 것이다.  Archimedes는 존재하는 삼각형들 사이에서 면적A의 하나에서 출발하여 가산되어지는 삼각형의 무한수열을 만들었고, 다음과 같은 포물선의 면적을 얻었다.  

 

            A, A+A/4, A+A/4+A/16, A+A/4+A/16+A/64, ......

 

    포물선의 부분의 면적은 다음과 같다

 

             A( 1+1/4+1/42+1/43+......... ) = (4/3)A.

 

    이것은 첫 번째로 알려진 무한급수의 합의 예이다.

 

    Archimedes는 원면적의 근사치를 구할 때 이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물론 π의 근사값을 유도하는 적분의 초기(初期)예이다.

 

    Archimedes의 다른 '적분'중에는 구의 체적과 표면적, 원추의 체적과 면적, 타원의 표면적, 회전포물면의 부분과 회전쌍곡면의 부분의 체적이 있다.

 

    16세기에 중력의 중심과 같은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기계공들이 수학자들을 쓰기시작했을때야 비로소 진보가 이루어졌다. Luca Valderio는 이런 유형의 면적을 구하는 법을 담은 De quadratura parabolae를 로마에서 출판하였다(1606). Kepler는 혹성운동을 연구하는 그의 작업에서 타원부분의 면적을 알아내었다.  그의 방법은 선을 합하면서 면적을 구하려는 생각과, 적분의 다른 불완전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Kepler는 다소 운 좋게도 적은 시간동안 이 작업에서  두개의 오차를 수정한 후에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각각 3년터울로 태어난 세명의 수학자들은 다음에 수학에서 큰 기여를 하게되었다. 그들은 Fermat, Roberval와 Cavalieri이다. Cavalieri는 적분에서 Kepler가 시도한 '불가분(不可分)의 방법'을 따랐다. 그는 그의 연구에서 이론적으로 철저하지 못했고, 그의 연구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것은 Cavalieri가 면적은 구성요소가 선이고 '불가분'의  무한 수들의 합으로 이루어 졌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낸다. 그는 이 방법을 이용해 0에서 a까지의 의 적분을 n값의 수에 대한 결과와 일반적인 결과의 추측을 보임으로 인해 임을 보였다.

 

    Roberval은 이와 같은 유형의 문제를 생각해봤지만 Cavalieri보다 훨씬더 이론적으로 철저했다. Roberval은 무한의 협소한 직사각형대의 무한수로 이루어진 곡선과 직선사이에서의 면적을 주의하여 보았다. 그는 이를 0에서 1까지의 의 적분에 적용하여 다음과 같은 근사값을 보였다

 

           .

 

    그 다음 Roberval은 n이 무한대로 갈 때 이것이 1/(m+1)로 가고, 결국 이 면적을 계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Fermat도 또한 증명은 제시하지 못했지만 그의 연구에서 상당히 이론적으로 진지했다. 그는 포물선과 쌍곡선을 다음과 같이 보편화했다.

 

            포물선 : to

            쌍곡선 : to             

 

    문제 중에서, Fermat은 1에서 n까지 의 합을 계산하였다.

 

    Fermat는 또한 접선이 곡선에서 x축과 평행할 때를 고려하여 최대값과 최소값을 연구하였다.  그는 Descartes에게 편지를 써서 함수의 도함수가 0일 때 계산하는 최대값과 최소값 찾기라고 불려지는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근본적인 방법을 알려주었다. 사실, 이 방법으로 인해 Lagrange는 그가 Fermat이 미적분학의 발명가로 생각했음을 명확히 진술하였다.

 

    Descartes는 1637년 La Geometrie에서 이중교점에 기초를 둔 법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De Beaune는 그의 방법을 확대함과 동시에 이중교점을 이중근으로 이동시키는 곳에서 법선을 접선으로 적용하였다. Hudde는 기초적으로 도함수가 포함된 Hudde의 법칙으로 알려진 간단한 방법을 발견했다. Descartes의 방법과 Hudde의 법칙은 Newton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Huygens는 Cavalieri의 증명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 엄밀히 만들어 질 수 있도록 확신시켜주는 증명이라고 비평했다. Huygens는 주로 Leibniz에게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미적분학의 더욱더 만족할만한 연구를 위해 많은 부분에서 활동하였다.

 

    다음의 주요한 단계는 Torricelli와 Barrow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Barrow는 점들이 서로 알려진 Barrow미분삼각형 내에서 근접하는 현의 극한으로 주어진 접선인 곡선에서 접선의 식을 얻었다.

 

    Torricelli와 Barrow는 둘 다 변수속도에 관한 운동의 문제를 연구하였다.  거리의 도함수는 속도이고 그리고  그의 역연산은  속도로부터 거리를 얻어내었다. 따라서 미분의 역의 인식을 본질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고, 미분과 적분이 서로 역이라는 생각도 Barrow와 비슷했다.  사실 Barrow가 미적분학의 기본적인 정리를 명백히 진술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결과를 향하여 연구하고 있었고 그리고 Newton이 이 방향으로 계속 연구해서 명백히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를 진술했다.

 

    Torricelli의 연구는 Italy의 Mengoli와 Angeli에 의해 계속되었다.

 

    Newton은 1666년 10월에 유분(流分:현재의 미분)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많은 수학자들에 의해 알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그 당시에 출판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미적분학이 지녀야할 방향에 큰 영향들 주었다. 극값에 관한 Newton의 생각은 좌표상의 움직이는 두 직선에서의 곡선을 찾아내었다. 수평속도 와 수직속도 는 시간의 변화에 따른 의 미분이었고, 그때의 변화량도 그 자신이었다. 의 접선의 기울기는 이다.

 

    1666년 그의 논문에서 Newton은 역의 문제를 연구했다. 주어진 의 관계에서 를 찾았다. 결국 접선의 기울기는 각각의 에 대해 로 주어졌으며 Newton은  이 문제를 역미분으로 풀어내었다. 그는 또한 역미분에의해 면적을 계산하였고 이 연구는 미적분학기본정리의 최초의 명백한 진술을 포함했다.

 

    Newton이 그의 수학적 업적을 출판하는데는 문제가 있었다. Barrow는 자신의 책을 출판한 인쇄업자가 도산했고, 이후 출판업자들이 수학논문의 출판을 기피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이를 비난했다.  "Analysis with infinite series"라는 제목의 Newton의 책은 1669년에 쓰여졌고, 손으로 쓴 필사본이 유통되었다. 그 책은 1711년까지 출판되지 못했다. 이와 비슷하게 그의 "Method of fluxions and infinite series"는 1671년에 쓰여졌지만, 1736년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쓰인 원본은 훨씬 뒤에도 출판되지 못했다.

 

    위 두 연구에서 Newton은 , 그리고 지수함수의 급수전개에 관한 계산을 하였다.  이 지수함수는 Euler에 의해 현재 기호가 로 소개되기까지 확증되지 못했다.

 

    여러분은 지금 Taylor, Maclaurin급수라 불려지는 과 와 의 급수전개를 할 수 있다.

 

    Newton의 다음 수학적 논문은 그의 "광학"이라는 책에서 부록으로 출판된 1704까지 출판되지 못한 1963년에 쓰여진 "Tractatus de Quadratura Curvarum"이다.  이 논문은 극한을 포함한 다른 접근을 포함하고 있었다. Newton은 말하길

 

    으로 변해감에 따라 으로 변해간다. 즉, 무한급수방법에 의해,

            

결국 극한에 의해 o이 되는 증가분으로 잡아주었다.

 

    Leibniz는 1672년 유럽여행때 파리에서 Huygens를 만나게 되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또한 1673년 런던에서 Barrow의 논문을 포함한 몇 권의 수학책을 사러 갔다가 Hooke와 Boyle도 만나게 되었다. Leibniz는 Barrow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Leibniz는 미적분학에서 Newton과 다른 기초개념에서의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Newton은 시간에 따라 변수가 변하는 것을 고려했다.  Leibniz는 무한대로 가까운 값을 수열로 정렬함으로서 변수 x, y를 생각했다. 그는 이 수열의 연차 값을 통하여 미분으로서 dx와 dy를 소개했다. Leibniz는 dy/dx가 접선을 뜻한다고 알고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정의적인 성질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Newton의 적분법이 주어진 미분상의 변량을 찾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적분법과 미분법이 역관계라는 사실이 적용되었다. Leibniz는 합으로서 적분을 이용했다. 그리고 이는 Cavalieri의 방법과 꽤 비슷했다. 그는 또한 무한의 속도들의 를 사용했을 때 미적분의 dx, dy를 사용함에 기뻐했다.  물론 Leibniz와 Newton모두 함수에 의해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둘다 항상 그래프 식으로 생각했다.  Leibniz가 해석학적으로 연구하는 동안 Newton은 기하학적이었다.

 

     Leibniz는 좋은 기호를 찾아내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함을 크게 자각하고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었다. 반면 Newton은 더 자기 스스로 연구했고 그 결과 어느 날 그가 생각했던 기호법은 무엇이든지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Leibniz는 d와 ∫의 기호법을 훗날 중요한 발전을 입증해준 연산자의 형태를 두드러지게 했다. 1675년 Leibniz에 의해 정리된 기호는

 

                          

 

이고 이는 오늘날까지 쓰여지고 있는 기호로서 정착되었다.  그의 적분학의 결과는 1684년과 1686년 "Calculus summations"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적분학의 제목은 1690년 Jacob Bernoulli에 의해 제시되었다.

 

    Newton과 Leibniz 후의 미적분학의 발전은 Jacob Bernoulli와 Johann Bernoulli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러나 1734년 Berkeley가 그의 Analyst를 출판했을 때 미적분학에서 이론의 정밀함의 부족을 비난했고, 그것이 기초적으로 깔고있던 대부분의 노력의 성과인 엄밀한 증명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논리를 배격했다. Maclaurin의 미적분학은 정밀한 기하학적인 바탕에 놓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미적분학의 만족스런 토대는 19세기 Cauchy의 연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