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와 아라비아 수학

 

                         

                                                  

인도

 

고대 인도의 수학 발전에 관해서도 정확한 기록 부족으로 인하여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가장 오래된 역사는 5000년 전에 폐허가 된 모헨조다로의 한 도시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쓰고, 셈하고, 무게를 달고, 측량을 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관개수로도 파놓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기초 수학과 공학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약 4000년 전에 방랑족들이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으로부터 인도로 내려왔는데 이들이 바로 아리안족이었는데, 이들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산스크리트어의 구어체와 문어체를 완성하였으며 카스트제도를 도입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인도를 침입했으나 영구적인 정복은 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 위대한 문법학자 파니니와 석가모니 부처가 활약하였다. 또 이시기에 아마 <술바수트라스 '새끼의 규칙'>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새끼를 꼬아 제단을 건축할 수 있는 기하학적 법칙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피타고라스 3쌍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326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북서 인도를 일시적으로 정복한 후 마리우스제국이 세워졌고 멀지않아 그들은 인도 전역과 중앙아시아 일부로 뻗어나갔다. 가장 유명한 마우리아 통치자는 아소카왕으로서 그의 전성시대에 인도의 중요한 도시마다 커다란 돌기둥을 세워 놓았는데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이 돌기둥들 중 몇 개에 현재의 수 기호의 가장 오래된 견본이 새겨져 있어 매우 흥미롭다.

 아소카 왕 이후로 인도는 외부의 침입을 계속 받았으나 결국 토착 인도 황제들의 굽타 왕조로 이어졌다. 굽타시대는 인도가 학문, 예술, 의학의 중심지가 되었고, 풍요로운 도시들이 생겨나고 대학이 세워졌다.이때부터 인도 수학이 종교보다는 천문학에 공헌하게 되었다.6세기 작품인 <판챠 싯단티카>는  초기 인도 삼각법의 훌륭한 개요와 분명히 프톨레마이오스의 현표로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인(sine)표를 싣고 있다.

 450년경부터 1400년대 말엽까지 인도는 또다시 수많은 외부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이 기간에도 뛰어난 인도 수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중에 먼저 아리아바타(Aryabhata 476- ?;아리아바티아의저자)가 있었고,그 다음에 브라마굽타(Brahmagupta 598-628 ;브라마굽타 싯단타 저술 진정한 대수의 발견자), 마하비라, 바스카라(Bhaskara 1114_?)가 있었다.

 바스카라 이후의 인도 수학은 오늘날까지 간헐적인 발전만을 이룩했다. 1907년에 인도 수학회가 발족되었고 2년 뒤에 마드라스에서 인도 수학회 논문집이 출간되었고 인도 통계학 논문집인 <산키야>가 1933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했다.

 현대의 가장 눈에 띄는 인도 수학자는 가난한 판매원이었으며 교육받지 않은 천재, 스리니바사 로마뉴잔일 것이다. 그는 복잡한 수의 관계를 빠르고 깊게 통찰하는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 수론학자 하아디의 눈에 띄어 다음 해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어 주목할 만한 수학적 교제가 바로 그들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흔히 수학사에 관한 책들은 인도 수학을 다룰 때 약간의 모순과 혼동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아마도 인도 저자들의 상당히 모호하고 때로는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저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인도 수학사는 여전히 더욱 신뢰할 만한 학술적인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셈법

 

현재 우리의 위치 수체계의 발전에 인도가 해 낸 역할을 살펴보면 페르시아 수학자 알화리즈미가 825년에 출간한 책에서 완전한 인도 수체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위치값과 영(zero 0 )을 800년 이전에 이미 인도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위치 수체계에 의한 인도의 셈법에 관하여 몇 가지 더 살펴보자.

 인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지우기 쉬운 묽은 흰 물감을 묻힌 막대 펜으로 작은 흑판 위에다 막대를 가지고 썼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쓸 공간은 매우 작았고 읽기 쉽게 하기 위하여 글씨를 크게 써야 했지만 지우거나 고치는 것은 간단히 할 수 있었다. 쓸 공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계산이 끝난 숫자는 지워버리게 고안되었다.

초기 인도의 덧셈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더해가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345와 488을 더하는 것을 보면 우선 셈판의 상단의 약간 아래쪽에 한 수를 쓰고 그 밑에 다른 한 수를 쓴 다음 계산을 하는데 바뀌고 그 다음 자리는 2가 된다. 따라서 7은 지워지고 82가 쓰였다. 그 대신에 우리는 7을 긋고 그 위에 8을 썼다. 그러면 5+8=13이므로 2는 3으로 바뀌며 그 다음 수도 3이 된다. 그래서 최종적인 답 833이 셈판의 상단에 나타난다. 이제는 345와 488을 지워버릴 수 있으며 더 많은 계산을 하기 위해 셈판의 나머지 부분도 깨끗이 해놓는다. 곱셈에 대해서도 여러 방법이 사용되었다. 곱셈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계산된다.

 

산술과 대수

 

  인도인들은 재능 있는 산술가였으며 대수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많은 산술문제들이 역산법으로 풀었는데 이것은 주어진 정보로부터 거꾸로 계산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바스카라의 <릴라바티>에 나오는 다음 문제를 생각해 보자.

  

  "반짝이는 눈을 가진 아가씨, 역산의 올바른 방법을 안다면 내 말을 들어봐요, 어떤 수에 3을 곱해서 그 곱의 3/4을 증가시키고 7로 나눈 다음, 그 나눈 것의 1/3을 빼서 자신을 곱한 뒤 52를 다시 빼고 그것에 제곱근을 취해서 8을 더하고 10으로 나누면 2가 된다오. 그 수는 얼마이겠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문제에서 10으로 나누라고 지시한 곳에서 10을 곱하고,8을 빼고, 제곱근을 구하는 곳에서 제곱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 연산을 그 역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역산'이란 이름을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그 문제를 풀려고 할 때와 똑같은 방법이다. 즉 구하려는 수를 x로 나타내면

                      

                        

 

이 문제는 또한 산술문제를 시가(詩歌) 형태로 표현하는 인도인들의 관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이유는 학교 교과서가 운문으로 쓰여졌고 또 문제들이 자주 사교적 오락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은 등차수열과 등비수열의 합을 구했으며 단리, 복리, 할인, 조합 등에 관한 상업적 문제를 풀었다. 그들은 또한 현대교과서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혼합물 문제와 물통 문제도 풀었다.

 인도의 대수는 약어의 대수였다. 덧셈은 보통 옆으로 나란히 나타내었고. 뺄셈은 감수 위에 점을 찍어 표시했으며 곱셈은 인수 뒤에 'bha'를 썼고 나눗셈은 피제수 밑에 제수를 썼으며 제곱근은 'ka'를 그 수 앞에 써서 표시했다. 미지수를 'ya'로 기지의 정수들은 'ru'로 미리 고정하였다.

  은 다음과 같다.

    ya ka 8 bha ka 10 ru 7

인도인들은 음수와 무리수를 인정했으며 2차 방정식이 두개의 근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또한 인도인들은 부정해석학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으며 일반적인 방법을 고안하였다. 디오판투스는 부정방정식에서 한 유리해를 구했지만 인도인들은 그와는 달리 모든 가능한 정수해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기하학과 삼각법

 

인도인들은 기하학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들의 기하학은 주로 경험에 의존했으며 일반적으로 측량과 연관되어 있었다. 고대의 <수바수트라스>는 초기 인도인들이 제단을 건축하는데 기하학을 이용했다는 것과 그 때 피타고라스의 관계식을 이용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브라마굽타와 마하비라는 삼각형의 면적을 그의 세 변으로 구하는 헤론의 공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순환사변형의 면적을 구하는 공식을 주었다.

인도 기하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하고 그 우수성에 있어서 독보적인 것은 '브라마굽타의 정리'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네 연속변이 a, b, c, d 인 순환 사변형의 두 대각선   m, n 은

  

 

아라비아

 

아라비아 사람들은 문명사상에 이채를 발하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이름 없는 무지하고 통일되지 않은 부족으로서 정치와 전쟁에 대한 훈련도 없었으나, 그것이 10년 동안에 종교적 열광의 용광로에 용해되어 강력한 국민이 되었다. 더우기 1세기 사이에 그 영토는 인도에서 북 아프리카를 횡단하여 스페인까지 확대되었다. 이 승리의 대행진곡을 연주하고나서 100년이 지난 뒤, 학술 연구의 지도자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슬람교도는 그 당시의 대학자가 되었다. 모하멧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망한지 약 150년 후에 바그다드의 칼리프알-만수르의 궁전에서 인도의 과학이 학습되기 시작했다. 기원 773년에는 인도의 천문학자가 궁정에 온 일이 있고,그가 가지고 온 천문학상의 모든 표가 왕명에 의해서 아라비아인들 사이에서는 <sindhind>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브라마구프타의 <Siddhanta>라는 말에서 유래했을 것이다.이 표와 함께 아마 인도 숫자도 수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리스의 학자인 디오판토스는 아라비아에 소개된 최후의 학자로 그리스 학문을 배운 것으로 나타난다.

 

산술과 대수

 

마호메트 이전의 아라비아인들은 모두 숫자를 말로 적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아라비아 산술책은 알-화리즈미가 쓴 것이며, 그 뒤를 이러 후대의 저자들이 많은 아라비아 산술책을 썼다. 여기에는 제곱근, 세제곱근, 분수, 3수법 등도 설명되고 있다.

3수법은 초등 산술의 다른 경우처럼 인도로부터 기원된 것처럼 보이며 브라마굽타와 바스카라에 의해 붙여진 것이며, "3수법에서 '요구'에 '결실'을 곱하고 '논증'으로 나누면 '성과'가 된다."라고 하였다.

 

  "거북이가 3/7시간 동안에 5/2km를 걷는다면 이 거북이는 9시간 동안에 몇 km를 걸을 수 있는가?" 여기서 3/7과9는 동일한 종류로서 '논증'과 '요구'이고 5/2가 '결실'이다.

 

그 답은(9)(5/2)/(3/7)=52(1/2)이 된다. 오늘날 이 문제는 비례의 단순한 응용에 불과하다.

  x : 9 = 5/2 : 3/7

 

 

기하학과 삼각법

 

아라비아인들이 기하학에 있어서 행한 중요한 역할은 어떤 발견에 있다기보다는 기록의 보존에 있었다. 그들이 위대한 그리스 고전을 만족스럽게 번역하려고 애쓴 노력에 세계는 큰 빚을 진 셈이다.

 알하젠의 문제는 한 평면 위에 한 원과 두 점이 주어질 때 원주상의 어떤 점에서 주어진 각 점까지의 거리의 합이 최소가 되는 원주상의 점을 구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알하젠으로 알려진 수학에서 전해 내려온 이름이다.

 인도에서처럼 아라비아 수학자들도 근본적으로 스스로를 천문학자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삼각법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몇 가지 어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이름과 단어들의 기원이 아라비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의 '대수'라는 단어도 그 주제에 관한 알화리즈미의 논문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재결합과 대립의 과학'으로 해석되며, 라틴어 번역본으로 '방정식의 과학'과 동의어로 단어 'algebra'가 만들어졌다.

인도 숫자의 이용에 관한 알-화리즈미의 책이 또 한 단어를 수학용어로 소개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알-화리즈미'의 이름이 '알고리트미'로 변하였고 다시 그것은 오늘날의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계산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알고리즘(algorithm)'이 되었다.

 '사인'을 제외한 삼각함수의 오늘날의 이름의 의미는 각이 단위 원의 중심에 놓일 때의 기하학적인 해석에서 나온다.

 또한 단어 'sine'의 기원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