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수학

-암흑시대를 중심으로-

 

 

 

  그리스 철학과 과학이 처음으로 로마세계에 침투했던 기원전 1∼2세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중 서유럽의 과학은 A.D. 5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가장 침체해 있었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점차적 분열과 변형, 그리고 국교로서의 기독교의 승리가 이 시기에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사건들은 거의 불가피하게 이 시기 과학의 쇠퇴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커다란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이미 디오클레티안의 재위기간(A.D.285∼305)에서부터 수세기 동안의 정치적 불안정은 로마제국의 동서분할을 가져왔었고, A.D. 395년 테오도시우스의 죽음 이후에는 그 분할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5세기를 통해서는 서로마가 게르만 부족의 침입의 희생물이 되었고, A.D. 500년에는 그 상당 부분이 게르만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겉가죽만 남았을 뿐 그 실체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으며, 몇 세기 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서유럽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정치적 활동을 형성시켰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정부의 붕괴와 제국의 초창기 몇 세기 동안을 아주 잘 특징지어 줬던 도시생활의 점차적인 소멸과 함께 서유럽에서의 지적인 생활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적당한 정도의 정치적 안정, 도시활동 그리고 어떤 종류의 <개인적 후원(patronage)>이 과학의 추구에 필수적이거나 적어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이것들의 부재는 어떻게 서유럽 역사의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과학의 이해와 그 성과가 쇠퇴하고 침체했던가를 아주 일반적인 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1)

  흔히 중세의 이 기간을 유럽의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529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아테네에 있었던 비(非)크리스트 문화의 최후의 보루인 아카데미아가 폐쇄당함으로써 본격적인 암흑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수학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중세의 의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상황은 비록 암흑기 였지만, 인도와 아라비아등 비유럽쪽에서 발전의 성향이 보였고, 특히 주목할만한 일로는 그리스 수학이 번역되어 오랜기간 보존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가 수체계와 셈법을 발전시켜 대수발전에 공헌을 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면 아라비아는 세계의 많은 지적 재산을 관리하여 후대의 유럽인들에게 넘겨줌으로써 인류 지성사의 발견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할수 있다.

  여기에서는 중세 유럽의 암흑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수학의 발전이 미비했던 만큼 왜 그렇게 까지 되었는지에 대한 이 시대의 사회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같다. 로마제국이 몰락하는 5세기 중엽에서 11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서구 문명은 쇠퇴 일로에 있었다. 학교 교육은 없어지고, 그리스의 학문은 거의 사라지고, 고대 세계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예술과 기술은 잊혀져 갔다. 단지 카톨릭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몇몇 지식인들만이 그리스와 라틴 학문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갔다. 이 기간은 강렬한 종교적 신앙으로 덮혀지면서 고대의 사회질서는 무너지고, 사회는 봉건적이고 교회 중심적으로 변하였다.

  로마인들은 수학을 추상적으로 몰두하지 않고 상업이나 토목공학과 관련된 단순한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연구하였다. 그나마 로마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동서무역은 거의 정지되고, 도시건설 계획이 포기되고, 또 이들에 대한 관심마저 약해지면서 수학에 있어서는 기독교 역법(曆法)의 발전을 빼면 서구에서 이 암흑시대의 500년 내내 거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2)

  이제 수학자들을 중심으로 암흑시대에 대하여 알아보자.

● 보에티우스 (Boethius, 약 475-524)

  보에티우스는 로마에서 출생하여 아테네에서 그리스 문학과 과학등을 배웠다. 그가 암흑시대에 특별히 활동한 바는 없지만 그의 기하학과 산술에 관한 저작이 수세기 동안 수도원 학교의 표준 교과서로 사용되어왔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가 쓴 책으로는 니코마코스(Nicomachus)의 산술(Arithmetic, 4세기 초)을 번역한『산수입문』(Institutio arithmetica)과 유클리드의 <원론>을 추린 『기하학』(Geometry)이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의 내용은 매우 빈약할 뿐만 아니라 특히 『기하학』의 경우 증명도 생략되어 있어 부분적으로 표절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당시에 높은 수학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간주된 것만 보아도 암흑시대에 기독교 유럽의 수학이 얼마나 황폐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 이시도루스 (Hispalensis Isidorus, 560∼636)

  보에티우스 이후는 전혀 휴식 상태였는데, 약 1세기 뒤에 스페인의 세빌랴에 카톨릭 주교인 이시도루스가 나오게 된다. 그는 백과전서인 『어원학』을 편집했는데 이 전서의 일부분에 보에티우스가 니코마코스에게 배워서 나타내었던 「4과」(quadruvium)가 들어있다. 「4과」란 수학을 산수, 음악, 기하학, 천문학으로 나눈 것인데 이후 중세기를 통해 널리 사용된다. 이시도루스는 또한 수를 홀수와 짝수로 나누고, 완전수나 과잉수 그밖의 것에 대해서 설명했다. 《모든 것에서 수를 제거해 버리면 모든 것은 파멸로 돌아간다》라는 수를 찬미하는 말도 했다고 한다.

 

● 베다 (Bede, 약 673-735)

  이시도루스 이후 수학사는 그야말로 완전한 암흑 시대가 되는데 673년 영국의 노섬 (Northumberland, 영국 동북부의 주)에서 베다가 태어나 중세 교회학자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고 역법과 손가락 셈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의 저서에는 『역산론 (曆算論)』(Computus)이 있는데 여기에 부활절 날짜를 결정하는 법과 손가락 계산이 포함되어 있다. 부활절 날짜를 바르게 결정하는 것은 당시의 교회를 소란케 한 큰 문제였다. 각 수도원에서는 적어도 한 사람의 수도사가 제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요구에 의해서 산수에 능통한 연구에 인재의 출현이 소망되고 있었던 것이다. 칸토르에 의하면 《카시오도루스와 베다, 그 밖의 사람들의 부활절 날짜의 계산, 즉 시간 특정의 중심점은 19년 만에 한번씩 태양시(太陽時)와 태음시(太陰時)가 일치하는 것에 기준을 두고 있다. 간단히 이 문제를 풀고 싶어한 것은 당시의 산수 지식으로 볼 때 과분한 요구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 알쿠인(Alcuin, 735-804)

  베다가 사망한 해는 마침 알쿠인이 태어난 해가 된다. 그도 역시 영국(요크셔, 영국 북동부의 주)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았다. 후에 카알대제의 궁전에서 프랑크 대제국의 교육을 관리했다. 또 알퀸에 의해서 수도원에도 학교가 세워졌고, 거기서는 찬송가와 습자, 노래, 계산 (즉,  Computus), 문법 등을 가르쳤다. 생도 자신은 부활절의 결정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를 갖지 않았으므로, 이 computus라는 말은 틀림없이 계산법 일반을 설명한 것으로 생각된다.(역법이 아님) 당시의 셈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수 없으나, 알퀸이 산판 (算板)이나 보에티우스의 숫자(아피케스)를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중세의 학자 중에는 수론(數論)을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매우 많은데 알퀸도 역시 그랬다. 예를 들면  6은 약수인 1, 2, 3의 합이 꼭 6이 되는 완전수이기 때문에 만물의 창조자인 신이 만든 생물의 수이고, 8은 1+2+4<8 이므로 부족수이어서 인류의 제 2의 기원은 8에서 나왔으며,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영혼도 8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알퀸이 쓴 책 중 『마음을 민첩하게 하는 문제집』이라는 잡집(雜集)이 있다. 우선 이것은 제목에서 보듯이 중세기 암흑기의 잠든 지식들을 깨우려는 인간들의 잠재의식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뜻있다. 이 책에는 헤론이나 그리스 명문집, 또는 인도에서 볼 수 있는 수원 (水源)문제등 산수 문제 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책에 실린 문제들은 앞에서 논술한 로마의 문제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기원은 확실히 로마라고 생각되지만, 이 잡집의 해법은 로마의 해법과는 전혀 다르고 또한 잘못되어 있다고 한다.

 

● 제르베르(Gerbert, 약 950-1003)

  제르베르는 프랑스의 오베르뉴(Auvergne)에서 태어나 일찍이 비범한 재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카알 대제 이후 침체했던 수학분야의 연구가 그에 의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스페인의 회교학교에서 공부한 최초의 기독교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또 0이 없는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기독교 유럽에 전파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는 또한 보에티우스의 수학책을 주의해서 연구하여, 자기 스스로 『산판의 계산법』,『수의 나눗셈에 대한 소저(小著)』라는 사수서들을 공표하였다.

  제목에서 보듯이 제르베르는 산판을 사용했다. 제르베르의 제자 베르넬리누스에 의하면 당시의 기하학자는 빤질빤질한 판 위에 푸른 모래를 뿌리고, 그 위에 도형을 그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산수를 계산할 때는 판을 30행으로 구획하고, 그 중 3행은 분수 계산에, 나머지 27행은 3행씩 9조(組)로 나누어 각 조의 3행에는 따로 따로 C (100자리, centum), D (10자리, decem)및 S (단위, singularis) M (1자리, monas) 라는 글자가 기입되어 있다고 한다.3) 그는 또 9개의 숫자(보에티우스의 apices)의 용법을 제시하였으며, 이들의 행을 이용하면 영이라는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도 기입할 수 있었고, 산수의 모든 운산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시대의 가법, 감법 및 승법의 계산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것과 별 차가 없다.

  그러나 나눗셈의 방법은 근대의 방법과 전혀 다르다. 나눗셈은 어려우므로 대개의 경우 고대 사람들은 몫의 관념은 모르고 있었다. 제르베르의『제법(除法)에 관한 법칙』은 현존하는 나눗셈에 관한 책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책에는 로마인들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여제법(餘除法; complementary division) 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이것은 제르베르 자신도《아무리 부지런한 산판가(算板家)라도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을 만큼 복잡하다.

  그는 수판뿐 아니라, 지구의(地球儀), 천구의(天球儀), 시계, 오르간 까지도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교회에서도 명성을 날려 마침내 999년에는 교황의 계승자로 선출되고, 점성술, 산술, 기하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하는 심오한 경지의 학자로서도 인정받았다.

 

● 제르베르 이후 ····

  제르베르의 시대에 이르러 과학과 수학에서의 그리스 고전들이 서유럽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여 회교문명 속에서 보존되어 온 고대의 학문들이 서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이는 회교국의 학문 중심지를 여행한 기독교 학자들이 만든 라틴어 번역본을 통해서, 또 시칠리아 섬의 노르만 왕국과 동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 리밴트(Levant, 동부 지중해 연안의 제국)및 아라비아 세계와 서유럽간의 통상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1085년에 톨레도(Toledo, 스페인 중앙부 타구스 강변의 도시)가 무어인들로부터 기독교인들의 손으로 넘어가자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회교학문을 습득하기 위하여 이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또한 기독교인들이 스페인에 있는 다른 무어인들의 중심지로 찾아 들면서 이윽고 12세기는 수학사에서 번역가의 세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두드러진 사람은 영국의 수도사였던 바스(Bath)의 아델라드(Adelard, 1120년경)와 이탈리아의 티볼리(Tivoli)의 플라톤(Plato, 1120년경), 크레모나(Cremona)의 제라르(Gherardo)등 이다. 이들은 많은 아라비아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유클리드의 〈원론〉과 알-화리즈미(al-Khowarizmi)의 천문학 표, 알- 바타니(al-Battani)의 천문학, 테오도시우스의 〈구면학, 球面學〉,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알-화리즈미의 대수 등이 있다.

 

  번역의 시대인 12세기가 지나고 나서 13세기에 주목할 만한 일은 피사의 상업 중심지에서 태어난 재능 있는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 보나치오의 아들, 1170?-1250?)의 등장이다. 그는 이집트, 시칠리아, 그리스, 시리아 등으로 여행을 하면서 동부와 아라비아의 수학을 접하게 되는데 이때 인도-아라비아의 계산술의 실용적 우수성에 완전한 확신을 가지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산반서, 算盤書, Liber abaci〉라는 유명한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산술과 초등대수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고 피보나치 수열 (1, 1, 2, 3, 5, …, x, y, x+y)도 여기에서 언급된다. 이것 외에도 〈실용기하학, Practica geometriae, 1220년〉, 〈제곱근서, Liber quadratorum, 1225년〉등이 있다.

  이후 수학사는 비교적 황폐했던 시기인 14세기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1) 중세의 과학 (에드워드 그랜트, 1992, 民音社)

2) 수학사 (Houward Eves, 1996, 경문사)

3) 數學의 歷史 (플로리안 캐조리, 1990, 創元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