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수학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Ⅰ. 중국

 

  고대 중국의 수학에 관해서는 그 근원적인 본질에 관한 어떤 것도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없다. 그 제일 큰 이유는 고대 중국인들이 그들의 발견을 영구 보존할 수 없는 대나무 위에 기록했다는데 있고, 더불어 기원전 213년에  진시황의 명령에 의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책들이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어에 익숙하지 못해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기원전 1030년경부터 주, 한, 후한, 당, 오조, 송, 원, 명왕조를 거쳐오면서 수학을 발전 시켰으나 유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도래가 있은 명조(明朝)에서 시작되었다.

 

1)주대에서 당대까지

  

  주(周)대 이전(즉 기원전 14세기 商나라 시대)부터 중국의 기수법은 10진법이었으며, 그 후도 계속 10진법이 사용되었다. 그 증거는 갑골문자 중에 547일이 500과 40과 7일로 기록되어 있다. 유럽은 중국보다 2300년 뒤져있었다.

  한(漢)대나 혹은 그 이전에 대나무 막대의 배열을 이용하는 막대 수체계가 만들어 졌는데  그 체계에서 빈 공간은 0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산술계산은 셈판 위에서 대나무 막대로 하였다. 오늘날 쓰여지는 수판(數板)은 나란한 막대나 줄에 움직일 수 있는 구슬을 꿴 것으로 1436년의 어떤 책에서 이를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지고 있

었는지도 모른다. 음수의 개념도 기원전 2세기 중국인들은 붉은 산목으로 나타내었다. 이는 서양보다 1700년 이나 앞섰다.

  마방진(魔方陣)은 주(周)대 이전에 개발되었다.

  고대 중국의 수학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구장산술, 九章算術>은 한(漢)대에 쓰여진 것으로, 훨씬 이전의 내용도 담고 있는데, 농업, 상업, 공업, 측량, 방정식의 해나 직각삼각형의 성질 등에 관한 246개의 문제를 싣고 있다. 여기에 해법이 주어지긴 하지만 그리스 식의 증명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예를 들면. 1장의 36번 문제에 밑변이 b이고 호의 높이가 s인 원호의 면적이 경험적인 공식인 로 주어지고 있다. 이는 그림1)로 부터 추정되었다고 본다. 즉 그림의 할선이  이등변 삼각형의 면적과 원호의 같아 보이게끔 그려졌을 때 할선은 각각 밑변을 양 그림 1)쪽으로 s/2만큼 연장시킨 곳을 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 경험 공식은 π를 3으로 취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연립 1차 방정식을 오늘날의 행렬법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풀고 있다.  그리고 구장산술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비산경>에서는 증명은 없지만 그림2)를 바탕으로 한 피타고라스정리에 대한 논의를 갖고 있다.

  

   그 뒤를 이어 한(漢)대의 수학자 순체가 구장산술과 유사한 책을 저술하였고 그 책에서 부정(不定)해석에 관한 최초의 중국문제가 등장한다. 예를 들면 "3으로 나눌 때 2가 남고, 5로 나눌 때 3이 남고, 7로 나룰 때 2가 남는 어떤 미지수가 있다.  그중 가장 작은 수는 무엇인가?" 인데 여기서 초등 정수론의 유명한 중국의 나머지 정리의 기원을 볼 수 있다.

  후한(後漢)시대에는 원주와 원의 직경의 비인 π를 계산  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많은 수학자가 있었는데 그중 3세기 때 왕판이라는 장군이 π의 값으로 π=3.155가 되는 유리 근사값 142/45를 만들어 내었고, 왕판과 동시대의 인물인 유휘(劉徽)는 <해도산경, 海島算經>이라는 구장산술의 주해서에서 구적법에 관한 새로운 자료중  

                            3.1410 < π < 3.1427

이라는 관계식을 이끌어 내었고, 그 후 약 200년 뒤에 조충지(祖沖之)와 그의 아들이 지금은 분실된 공저작(共著作)에서 3.1415926 <π< 3.1415927 의 관계식을 발견했다. 즉 소수 여섯 자리까지 정확한 π의 놀라운 유리 근사값 355/113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후 약간의 개선은 있었지만 서구의 수학자들은 1600년경까지도 조충지 부자의 근사값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2) 당대에서 명대까지

 

  당(唐)대에는 과거시험에서 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수학 책을 한데 모아 묶게 된다.

  최초의 수학 책은 1084년이 되어서야 나왔지만 625년 王孝通이 쓴 책에서는 <구장산술>에 있는  x3 = a 보다 복잡한 최초의 3차 방정식이 나온다.

  <구장산술>의 주요한 인쇄본은 1115년경 송조(宋朝)에서 나왔다. 송대 후반기에서 원대 전반기에 이르는 기간은 고대 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시기에 많은 중요한 수학자들이 활약을 하였고, 또 귀중한 수학책들이 나왔다. 이 중 진구소(秦九韶), 이야(李冶), 양휘(楊輝) 그리고 가장 위대한 주세걸(朱世傑)에 대해 살펴보면,  진구소는 순체가 남겨놓은 부정 방정식을 다루었으며, 중국 최초로 영(零)을 표시하는데 독립된 기호로서 원을 사용하였다. 또한 고차 방정식에서 제곱근을 뽑아내는 방법을 일반화 시켰는데, 이는 오늘날의 '호너의 방법'으로 알려진 대수 방정식의 수치해석을 이끌게 되었다.

 이야는 음수에 대한 표기를 소개한 사람으로 중국식 막대 수체계로 수를 썼을때 맨 오른 쪽 자릿수를 대각  선으로 획을 그어서 음수를 표현했다.        예를 들면 -10724를 다음과 그림 3)같이 나타낸다. (그림3)

 

  양휘는 <구장산술>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책에서 오늘날과 같은 방법으로 소수(小數)를 능숙하게  다루었고, 소위' 파스칼의 산술 삼각형' (그림4)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설명을 해주었다. 그 후 주세걸이 쓴 책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전해 내려온 중국의 산술적- 대수적 방법을 설명한 가장 완벽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행렬법을 이용하였으며, 소거법이나 대입법은 실베스터의 방법과 비견되어 왔다.

                               

  이후에도 계속 수학자들이 등장하지만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 중국은 당대 초기에는 인도의 영향이, 원대에는 아라비아의 영향이 나타나지만 서구의 영향은 명조시대의 수학에서 뿐이다. 즉 동양의 독자적인 수학이었다.

 

Ⅱ. 한국

 

  한국에서 수학이 체계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7세기말 신문왕 2년에 당의 교육제도를 본뜬 '國學'이 성립되고, 그 중 기술 분과의 하나로 산학(算學=수학)의 교과가 설치되면서이다. 그 후 조선조 말에 이르기까지 관학의 성격을 뛴 것이긴 하였으나 한 번의 단절도 없이 줄곧 수학의 전통이 지켜져 왔다.

 

1) 세종대왕과 수학

  세종대왕의 주요업적을 살펴보면 수학 정신 내지는 수학적 지식이 직접 필요한 것들뿐이었다. 즉 천문학과 음악에서 음계가 현 또는 관과 비례하는 것, 그리고 한글제정 작업에서 한글의 구성이 '종합과 분석이라는 근대 수학의 기본정신을 담고 있는가 하면, 농지를 측량할 때도 수학이 필요하였다. 즉, 세종대왕은 일찍이 수학의 중요성을 알고 부제학 정인지로부터 가장 높은 수준의 수학서인 <산학계몽, 算學啓蒙>을 직접강의 받기도 하였다. 또한 산학계몽과 함께 조선시대 관영수학의 본류로 사용된 <양휘산법,楊輝算法)은 한국의 근세수학 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역사상 수학에 열의를 보인 왕은 오직 세종대왕 한 분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왕이 되기위한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라 하여 수학을 왕세자에게 수학을 교육시켰으나 이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세종은 또 수학을 연구시킬 목적으로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세종 이후 이런 풍조는 점점 쇠퇴되고, 임진왜란을 계기로 세종대에 간행된 책들이 대량으로 일본에 넘어 갔으며, 이것이 기초가 되어 '화산(和算)'이라는 일본 전통수학을 일으키게 되었다.

 

2)시 형식의 수학

  조선조 말기에 가장 인기 높았던 수학 계몽서인 <산법통종, 算法統宗>에 보면 시형식으로 된 몇가지 예를 들 수 있다. (한가지만 들어보면)

我間店家李三公   衆客都利來店中

一序七客多七客   一序九客一房室

("여관업을 하는 이가(李哥)의 집에 손님이 많이 몰려 왔는데, 한방에 7명씩 넣으면 7명이 남고, 한방에 9명씩 넣으면 방 하나가 남는다. 손님의 수 와 객실의 수를 알아내라")

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형식으로 된 수학은 억지로 수학을 시의 틀에 맞추어 문제를 제시한 탓으로 문제의 표현이 애매할 때가 많았다. 더욱이 한국 사람에게는 한자가 일종의 외국어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러한 '외국어- 시- 수학'과 같은 이중적인 벽을 뚫고 수학을 접해야 했기 때문에 그 발달이 크게 제한을 받은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수학이 뒤늦게 도입되었지만 많은 발전을 가져 온 것은 그것을 제일 먼저 자기내 말로 고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수학을 시형식으로 나타낸 것은 한국과 중국외에도 인도나 이슬람(아라비아)에서도 두드러졌는데 이는 그 시대의 풍토가 지식의 사회의 중심으로 시구(詩句)중심이었던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현상은 수학이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잡지 못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3) 마방진의 연구( 한국의 전통적 수리사상 )

  조선의 기본적 정치 이념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였다. 따라서 사대부(士大夫)들은 유학의 교양을 갖추었으며, 이에 역(易 =周易)의 세계에 깊이 심취하였다.  특히 역의 기본원리를 도식화한 하도(河道), 낙서(落書), 그리고 이것들에 상징되는 신비적인 수 사상(數 思想)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 하도는 황하에서 나온 말(龍馬)이 입에 물고 온 두루마리 속에서 나왔다고 하고, 낙서는 낙수(落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도 와 낙서의 도표는 그림 5)에서 알 수 있듯이 1에서 10까지의 수로 이루어진 십자형의 간단한 방진(方陣-정사각형 꼴의 짜임새)이다.  짝수를 검게 홀수를 희게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음양사상을 나타낸다. 낙서는 미국의 프랭클린의 마방진과 같다. 하도 와 낙서에 직힌 점의 개수를 숫자로 표시하면, 그림 5)에서 볼 수 있듯 하도의 경우는 중앙의 5와 10을 무시하면 홀수의 조와 짝수의 조가 각각 합계 20이 되도록 배열한 것이고, 낙서의 경우 가로, 세로, 대각선이 합이 모두 15인 '3차'의 마방진이다.  이것이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될 지 모르나 이는 중국인들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녔었다. 중국에서 13세기쯤 마방진이 수학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양휘가 <양휘산법>중에 이것을 본격적인 수학문제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양휘의 연구는 순수한 수학적 입장의 것이었으며, 하도 및 낙서에 얽힌 원초의 마술적 신비주의의 요소는 찾아볼수 없으나 한국의 경우, 마방진에 대한 관심은 신비사상의 유착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조 대표적인 사대부 출신 학자인 최석정에게서 이를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그가 저술한 수학책 <구수략(九數略)>에서 마방진의 연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중 그림 6)왼쪽과 같은 9차의 마방진은 각 행, 각 열, 각 대가선의 합이 369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내부에 있는 A에서 I까지 9개의 소행열은 가로, 세로 3개의 수의 합이 각각 123으로 되어있다.  

 

  또한 거북모양의 마방진으로 이 도표는 1부터 30까지의 수를 중복하거나 빠뜨림이 없이 배열해서, 6개로 만들어진 각 組의 수의 합이 모두 93이 되도록 되어있다. 이것들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정도의 마방진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수에 대한 관심이 중세적인 신비사상의 단계에 머물렀고, 따라서 수 자체의 성질을 보다 깊이 추구하는 정수론과 같은 순수한 수의 이론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근세 조선시대 [사대부 수학]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4) 직업적인 수학자 집단

  중세적인 전통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는 데 있다. 일정한 가문에 태어나면 좋든 싫든 조상 대대로 이어온 직업을 물려받게 된다.

  조선시대는 수학이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았다. 독특한 수학자 집단이 형성된 것은 이 사실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현재도 조선시대에 공인된 이들 수학자의 명단이 남아 있는데, 수학의 고시 합격자 명단에 의하면 연산군 이후 조선조 말까지 무려 1,400명에 달하는 수학자가 배출되었다.

  조선 말기에 가까워 질 수록 이들 직업 수학자 층은 거의 세습화되었고, 결혼도 수학자의 집안끼리 하게끔 되었다. 이와 같이 수학자의 직업 공동체가 형성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르기도 하지만, 반면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수학자여서 평소 수학의 이야기가 화제가 될 때가 많아서 수학연구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조선 산사 집단은 수학연구에 전념케 만드는 경향을 낳기도 하였다.

 

5) 한말의 수학

  한말에는 조선이 마지막 재생의 길을 모색하면서 수학의 황금기가 열리게 되었다. 실학기에서 한말까지 많은 수학자가 배출되었고, 유명 무명의 수학 책이 발간되었다. 이 때의 두드러진 특징은 사대부 층에서 연구되어온 전통적인 형이상학적인 수리사상(역(易), 음양오행설)은 차츰 사라진 반면, 직업적인 中人 수학자들이 주로 다루었던 내용이 수학의 어울리는 학문체계로 다루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대표적인 학자들을 보면 남병길은 역법계산에 필수적인 합동식의 해법이 소개하였고, 이상혁은 전문적인 직업 수학자로 <산술관견(算術管見)>이라는 책을 통해 새로운 문제를 많이 연구하였는데, 기하학등의 미해결의 영역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6) 한국 수학의 특징 (한국 수학의 정리)

  첫째, 한국 수학이 중국 수학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중국 수학사의 흐름에 맞추어 유행적으로 추종한 것은 결코 아니다.

  둘째, 한국 수학은 크게 나누어 사대부의 교양수학과 관료조직 속에서 요구된 실용수학의 이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전자의 형이상학적인 기본관념과 후자의 실천적인 기능사이에는 조선말에 이르기 가지 뛰어넘을 수 없는 단층이 가로놓여 있었다.

  세째, 중국이나 일본의 수학사에서 말하는 민간수학 또는 민간 수학자는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의 수학자는 어떤 의미로는 거의 예외 없이 官學者들이었다.

  넷째, 관학과학의 하나인 산학을 담당하는 하급 기능직 관리 사이에서는 점차로 길드 조직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산사제도가 전기간에 걸쳐 꾸준히 지속되었던 이조에서는 세습적인 중인 산학자들간에 공고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다섯째, 이조의 사대부 수학과 중인 수학은 처음에 서로 병행 공존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말기에는 합류함으로써 수학 자체의 내부에도 변화를 가져온다.